咸陽 吳 氏 崇慕 行事

[스크랩] 함양오씨 숭조고택 이야기

중헌[重軒] 2010. 11. 4. 19:18

 

 

 

 

 

 

 

 

 

 

 

명 칭 :  숭조고택(崇祖古宅)
소 재 지 :  청기면 청기리 654
건 축 주 :  오행대(吳行大, 1738~1770)
건축시기 :  1770년대
소 유 자 :  오위창(吳偉昌)-함양오씨(咸陽吳氏) 우재공파(愚齋公波) 13세손
문 화 재 :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37호, 2008. 2. 18. 지정


건축 이야기
우재(愚齋) 오익(吳瀷, 1591~1671)의 5세손인 오행대(吳行大)가 서(芧)밭 밑쪽 감나무 아래 초가에서 거처하였는데, 1760년(영조36)대에 현재의 숭조고택의 창고 뒤에 터를 다지고 창고 1동을 먼저 건축하였다. 이후 오행대가 32세로 요절하자 부인 반남박씨(潘南朴氏, 1736~1806)가 1770년(영조46)대에 서밭 밑 초가 앞에 청기천과 전답이 내려다보이는 전망이 좋은 곳에 축대를 쌓고 숭조고택을 건축하여, 초가에서 이사하였다. 이후 우재공의 8세손인 오정교(吳正敎, 1825~1897)는 선대의 업을 이어서 가세를 더욱 확장하고, 저택에 조상을 숭배하는 집이라는 뜻에서 ‘숭조고택(崇祖古宅)’이란 편액을 걸었다.


건축 특징
숭조고택은 전통적인 조선시대 민가인 ㅁ자형의 특징을 보여준다. 경북 북부지방 민가의 건축양식인 전통 기와 저택과 쌀 천석을 저장할 수 있는 창고 1동, 그리고 행랑채를 건축하여 일반 가정집과 구성이 다르다. 건축 연대가 240년 정도로서, 마을 중심부의 언덕 위에 위치하고 있는데, 규모가 웅장하다. 이곳에는 가신신앙을 위한 성주함과 단지를 묻어 물을 보관하는 물두멍, 시렁, 횃대 그리고 수장시설에는 발디딤판이 설치되어 있다.


건축 구성
숭조고택은 정침과 고방채, 바깥 변소, 돌담으로 구성되어 있다.
숭조고택은 입구의 좌측에 막돌로 쌓은 바깥 변소가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은 돌담으로 통로와 변소의 공간을 구성한 후 기둥 4개를 세워 슬레이트로 맞배지붕을 올렸는데, 지붕을 제외하고는 원형이 비교적 잘 남아 있는 상태이다.
앞마당의 우측에는 정면 7칸 측면 5칸 규모의 ㅁ자형 건물인 정침이 자리 잡고 있다. 사랑채는 중문칸의 우측에 배치되어 있는데, 앞마당에 자연석으로 1m가량의 축대를 쌓고, 50cm 안쪽에 다시 1m높이의 자연석 축대를 쌓았는데, 뒤쪽으로 갈수록 낮아졌다. 이는 경사진 대지위에 위치한 까닭에 기단을 매우 높게 조성한 것이다. 평면은 좌로부터 사랑방, 사랑웃방, 감실마루를 연결한 뒤 전면에는 평난간을 두른 반 칸 규모의 퇴칸을 설치하였으며, 지붕은 팔작지붕을 얹었다. 중문칸의 좌측에는 외양간, 중장, 중방마루를 연접시켰는데, 우측 사랑채의 감실마루와 좌측의 중방마루는 각각 좌우로 돌출되어 있어 양날개집의 형상을 이루게 하였다.
중문칸을 들어서면 안뜰을 사이에 두고 3칸 규모의 대청이 있다. 대청의 자우에는 도장방과 상방을 연접시켰는데, 상방의 전면으로는 통래칸과 고방, 책방이 사랑웃방과 연결되면서 우익사를 이루고 있고, 도장방의 전면으로는 안방과 부엌이 중방과 연결되면서 좌익사를 이루고 있다.
부엌의 좌측 문을 나오면 뜰을 사이에 두고 큰고방이 배치되어 있다. 큰 고방은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맞배기와집인데, 사면에는 모두 판벽을 설치하였고, 정면의 가운데 칸에는 두 쪽 판문을 내었다. 고방의 내부는 모두 통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바닥에는 우물마루를 깔았다.


현판
숭조고택(崇祖古宅)

 

문중 이야기
- 나라의 위세가 어려울 때마다 앞장선 우재공파(愚齋公派)
함양오씨(咸陽吳氏)는 고려 고종 무렵 함양부원군 오광휘(吳光輝)로부터 시작되었다. 고려 말~조선 초를 이어오면서 대사성을 지낸 오세룡(吳世龍), 이조판서를 지낸 오중원(吳仲元)등 수많은 문관을 배출한 명문가로 자리매김해 왔다.
영양군에는 조선 초기 창신교위 중부장을 지낸 오필(吳滭, ?~1493)이 청송 진보에서 영양의 하원리로 옮겨왔는데, 바로 함양오씨의 영양 입향조이다. 이후 통정대부를 지낸 오민수를 거쳐 임란 때 많은 공을 세웠던 문월당(問月堂) 오극성(吳克成, 1559~1671)의 세 아들 가운데 둘째아들인 우재(愚齋) 오익(吳瀷)과 취수당(醉睡堂) 오연(吳演, 1598~1669)이 세상을 피해 청기에서 살았다.
오익은 1636년에 남한산성의 치욕을 듣고 분개하며, 이때부터 세상에 나갈 생각을 끊고 있었는데, 이 무렵 세상을 피해 청기로 와있던 표은(瓢隱) 김시온(金是榲, 1598~1669)이 그를 이 고을 이웃에 맞이하여 살게 한 것이다. 오익은 청계정(靑溪亭)을 짓고 김시온, 이준, 이시명, 정영방 등과 함께 왕래하며 고금을 토론하고 마음속의 느낀 바를 서로 시로써 읊조리며 은자(隱者)의 삶을 영위하였다. 오익은 임진왜란 이후에 정치에 대해 일체 참여하지 않고, 이황의 성리학에 몰두하여, 유학을 바탕으로 후손들에게 학문을 장려하였다.
오익의 아들 오이진(吳以晉, 1615~1681), 오이정(吳以鼎, 1619~1694), 오이승(吳以升, 1624~1660)이 호랑이가 자주 출몰하고 화재와 질병이 잦은 청기의 지기를 눌러야 한다는 풍수지리에 의해 영봉대(靈峰臺)를 마주보는 서(芧)밭 밑 찬물난골 입구에 터를 잡고, 우재공파를 형성하였다.
우재공파 집안에는 많은 인재들이 배출되었다. 오극성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을 도와 많은 공을 세웠고, 병자호란 뒤 효종이 즉위하여 북벌계획을 반포했을 때, 한양에서 뿐만 아니라 청기에서도 은둔하고 있었던 은사들을 주축으로 북벌군이 조성되었는데, 그 흔적은 ‘사명대비(思明臺碑)’, ‘대명동(大明洞)’ 등의 비석을 통해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일제강점기 때 영양의 삼일 운동의 주축이 바로 오익의 10세손인 오석준(吳錫浚, 1876~1951)에게서 시작하였다. 오석준의 손자 오윤승(吳胤承, 1875~1956), 오달승(吳達承, 1889~1953), 오재승(吳載承, 1892~1969) 등도 삼일운동에 참여하였다가 구속되어 옥고를 치루기도 하였으니, 특히 나라의 위세가 어려워졌을 때 나라를 위해 앞장선 인물이 많다.


관련유물
- 『문월당문집(問月堂文集)』, 『임란일기(壬亂日記)』
영양군 대천에 있는 임란공신인 오극성(吳克成)의 종택이 화재를 당해 『문월당문집』과 『임란일기』등 목판을 소실하였다. 이것을 숭조고택의 재력으로 새로 목판을 제작하여 영남 각 문중에 소장하게 되었다.

 

관련인물
- 오행대(吳行大, 1738~1770)
우재(愚齋) 오익(吳瀷, 1591~1671)의 4세손으로 효성과 우애가 지극했으며, 문예도 아주 뛰어났다. 부인은 반남박씨(潘南朴氏) 박명원(朴明元)의 딸(1736~1806)이다. 오행대는 서밭 아래에 자리 잡고 있는 초가 아래에 고을 사람들이 풍년이 들었을 때 곡식을 비축할 수 있는 맞배 기와지붕의 공동창고를 지었다. 오행대가 일찍 세상을 떠난 뒤 그의 부인이 현 위치에 숭조고택을 건축하였다.
- 오정교(吳正敎, 1825~1897)
자는 중오(重五)이고, 호는 구재(懼齋)이다. 우재 오익의 7세손이고, 오행대의 증손으로, 부친은 오관협(吳觀俠, 1797~1856)이고 모친은 항재 이숭일의 후손인 이광표(李光表)의 딸이다.
오정교는 퇴계학파를 계승한 재령이씨 집안을 외가를 두고 있었기 때문에 석보의 여러 인사들과 자연스럽게 교유할 수 있었다. 장성해서 외숙인 이상옥(李相玉)에게 수학하면서, 좌해(左海) 이수영(李秀榮, 1809~1892) 등과 교유하며 학문을 닦았다. 특히 소와(素窩) 김진우(金鎭宇, 1786~1855)는 오정교를 두고 “반드시 집안의 명성을 떨칠 인물”이라는 평가를 하였다.
오정교는 경전에만 마음을 쏟아서 잡서를 일체 거들떠보지 않았다. 특히 『중용』과 『대학』을 더욱 좋아하였는데, ‘계구근독(戒懼謹篤)’ 네 글자를 평생의 부절로 삼아, 자호하였다. 그래서 절도사 이만백(李晩柏)이 ‘구재(懼齋)’ 두 글자를 써 주었고, 이수영은 여기에 대한 설을 지어주었다.
오정교는 선유의 문집 가운데 특히 『퇴계집』을 좋아하였다. 평소 과거를 통한 출세에 마음을 두지 않았지만, 부친의 명에 따라 과거 공부를 했다. 부친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과거에 대해서 일체 단념하고 홀어머니를 섬기는데 최선을 다하였다. 그는 효행이 남달라서, 늙은 모친을 같은 방에서 기거하며 밤낮으로 식사나 옷, 잠자리, 세면, 세탁 등을 손수 보살피고 챙겨서 극진히 모셨다.
오정교는 선대의 업을 이어서 가세를 더욱 확장하고, 저택에 조상을 숭배하는 집이라는 뜻에서 ‘숭조고택(崇祖古宅)’이란 편액을 걸었다.
오정교는 저술을 좋아하지 않았고, 만년에는 더더욱 실천에 마음을 두었다. 후손들이 그가 남긴 약간의 글을 모아 『구재유고(懼齋遺稿)』 1책을 만들었다.

 

영양 > 영양청기권 > 청기면 청기리
- 사방이 막힌 ‘천옥(天獄)’ 청기리(靑杞里)
청기리는 동쪽에 영양읍으로 들어가는 큰골이 있으며, 동북쪽은 함박산(咸朴山)이 솟아있고, 서북쪽은 장갈령재가 예안과 경계에 자리 잡고 있으며, 남쪽은 일월산에서 흘러내리는 냇물의 원줄기인 청계천이 흐르고 있다. 북쪽에는 사인대산(士人臺山)이 솟아 있어, 사방이 산에 둘러싸여 ‘천옥(天獄)’이라고 부른다.
청기리는 1550년(명종5) 후반에 안동 내앞마을에서 이곳으로 들어와 황무지를 개간하고, 학교를 세워 영양지역의 문풍 혁신에 공이 큰 청계(靑溪) 김진(金璡, 1500~1580)이 우거한 곳으로, 명나라가 멸망한 후 숭정처사라 자처하며 대명의리를 간직한 표은(瓢隱) 김시온(金是?, 1598~1669)과 우재(愚齋) 오익(吳瀷), 취수당(醉睡堂) 오연(吳演) 등의 자취가 느껴지는 돈간재(敦艮齋), 청계정(靑溪亭), 취수당(醉睡堂) 등이 있다.
이 마을은 크게 건너마,월촌(越村), 군막구(軍幕丘), 정자마을,정자촌(亭子村), 조핏골,초동(椒洞), 진들,장평(長坪)로 구성되어 있다.
건너마,월촌(越村)은 마을 앞에 강이 흐르고 강 건너에 마을이 있는 곳인데, 동북간으로는 갓등산[冠嶝山]이 솟아 있고, 동쪽에는 큰골이 있으며, 함박산과 왕재 등이 영양과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본래 앞내를 건너야 마을이 있다하여 ‘건너마’라고 이름을 지었고, 이를 한자로 ‘월촌’이라고 한다.
군막구(軍幕丘)는 효종대의 청나라에 대한 북벌계획과 이 지방 유림과의 연관성을 엿볼 수 있는 곳으로, 취수당 앞의 개울 건너에 있는 작은 구릉이었는데, 지금은 밭으로 쓴다. 1649년(인조27) 효종이 즉위하자 북벌 계획을 실현하기 위하여, 각 마을에는 국력 배양을 위한 민간인 군사조직을 기르고 있었다. 이때에 오연이 김시온과 함께 창석(蒼石) 이준(李埈),석계(石溪) 이시명(李時明),석문(石門) 정영방(鄭榮邦),오익의 도움으로 취수당에서 병사를 모집하여 병서를 강론하고, 말 타고 활 쏘고 칼을 쓰는 법을 병사들에게 익히게 하였는데, 이 언덕에다 훈련병 막사를 짓고 마구간을 지었으므로 ‘군막구’라고 한다.
청계 김진이 우거한 마을이 있는 뒷산에 옛날부터 조피나무가 우거져 있어서 마을 사람들이 베어다 집을 짓고 살았다. 그래서 이 마을의 명칭은 조피나무가 많은 골짜기라 하여 조핏골, 조피골이라 불리고 있다.

 

출처 : 水 山
글쓴이 : 군계일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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